[018] 발해의 건국과 발전, 대조영,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발해 건국[김선생’s 한국사]=한국 민족사에서 발해는 한때 잊혀진 역사였다. 그러나 발해는 당에서 통일신라와 경쟁하면서 일본과의 갈등에 영향을 미쳐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.통일신라와는 매각 경쟁뿐 아니라 제한적인 범위에서 교류도 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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I. 대조영,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발해 건국 ① 료서 지방의 영주(고구려 영양 왕이 수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선제 공격한 곳)에 억류됐던 거란족의 이 진충(이·징츄은)손 만영(송·망용)이 당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봉기(696년 5월).② 대조영 집단, 거란족의 반란에 참가. 반란 실패를 앞두고”녹차 비우 집단과 함께 탈출”(697).③ 당의 끈질긴 추격에 대조영 집단 괴멸 직전, 천문령에서 주변 세력의 도움을 받아 당 군과 이겨(698).④ 대조영, 무리를 이끌고 동 어머니 산에 진국 건국(698년). ⑤ 당의 추가 공격 등 건국 기반의 취약한 상황에서 고 왕 대 조영(?~719)은 당과 대립했던 히가시 절단)와 통일 전쟁에서 당나라와 불편한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. 당나라의 위협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.⑥ 당의 발해에 사신을 파견, 대조영은 보답으로써 아들을 장안에 보내고 숙위(707년). ⑦ 당의 대조영을 발해 군왕, 홀한 주도독에 책봉. 아들의 발해 무왕은 가쓰라)군왕들에 책봉. 공식 외교 관계 수립(713년), 국호”스스무국”→”발해”로 변경.Ⅱ. 발해의 발전 1)무왕, 2대 재위 719~737)연호=인안( 인 앤)① 영토 확장으로 발해 영토의 기본 틀 만들기(북쪽과 동쪽의 마루 가르 복속, 남쪽의 대동강과 원산항 방면 진출)② 헤이룽장(러시아·아무르 강)주변의 크로 미즈 녹차는 발해 세력이 다가오자, 당나라에 지원 요청. 탕, 헤이수이 주도독부 설치(726년)③ 발해 무왕, 당과 헤이수이 말살 협공 타개를 위한 일본에 사신으로 처음 파견(727년). 이때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땅을 상당수 회복하다고 밝힌다.④ 발해-절단)-거란-일본 연합과 당-신라-헤이수이 녹차 연합 세력의 판도를 형성.⑤ 발해 장군, 장 문 휴산 히가시 등주 공격(732년 9월), 거란과 연합 당의 허베이 지방 공격(733년)→ 탕, 신라를 휩쓸고 발해 미나미 공격(실패)→ 탕, 전쟁 직후 신라에 패강 이남의 영유권 인정(신라 성덕 왕, 735년)⑥ 발해, 당나라에 사신 파견, 국교 회복(735년).⑦ 무왕은 동생의 대문예(템은이에)과 장인의 하야시 마사시(이 다음 가)에 헤이수이 말살 공격 명령. 동생의 대문예, 무왕의 항명 → 신변의 위협으로 당에 망명. → 발해, 대문예 송환 요구 갈등이 전쟁으로 발전.

강원 강릉시 성산면의 강릉 대공 산성(강원도 기념물 제28호 지정 1979년 5월 30일). 전설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알려졌다. 또 다른 전설로서는 발해의 왕족인 대씨이 만들었다고 알려졌다. 조선 고종 32년(1895년)을미 의병 때 민요 히로시(민·영호)이 이끄는 의병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. 문화재청 2)문왕(문 원, 3대 재위 737~793)연호=대흥, 호레키 ① 문물 제도 정비 건국 초기 고구려 제도로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인다.② 당,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에 승격 책봉 독립 국가 → 인정(762년)③ 중앙 행정 기구, 중앙 군대, 관리의 등급·복장 제도를 마련한다. 지방에는 부(경찰)-주-현의 3단계 행정 체계. ④ 771년에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이 천손인 것을 자임. 양국 관계를 옛 학생 관계(장인과 사위)에 설정하고 일본이 반발할 수. ⑤ 즉위 직후, 당나라에서 국가 의례를 정한 개원식, 역사서 등의 수입. 통치 전반에 “신라도”를 설치한 것 같다.3)선왕(10대 재위 818~830)발해의 정복 군주, 연호=건흥 ①액 왕 대 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4세 손자. 이때부터 왕의 계보가 바뀐다. 내분 수습하고 발전.왕권 강화로 융성기를 맞아 당나라가 “카이 성국”이라고 평가. 대외 관계의 안정에 따른 재위 12년간 일본에 5차례 사신을 파견.② 흑룡 강 유역의 헤이수이 녹차 통제, 남쪽으로 랴오둥 지방과 대동강 방면으로 진출. “사방 2000리”→”사방 5000리”로 확대. “바다의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하고 영토를 크게 열기에 공이 있었다”. ③ 5경, 15부, 62주 완비4) 대에비스진(11대 831~857)① 즉위 직후 관제 개편 → 좌우 신임 방안 군, 120개 설치.② 발해가 거란에 갑자기 멸망(698~926) 제11대 왕~마지막까지의 시호가 전해지지 않고 제13대 왕과 제14대 왕의 사망 연도도 불명. 9세기 후반 이후 발해 국왕의 계보도 전하지 않는 등 기록은 없다.③ 당의 빈 공과 대학에서 신라의 유학생을 제치고 수석(872), 발해 왕자가 신라의 사신보다 위의 자리에 앉는 것을 요구했다”쟁장 사건”(897)등이 단편적으로 알려지고 있다.④ 당은 안 사찰의 난(755년 11월~763년 1월), 황성의 난(875~884)이후 혼란 속에서 황성의 부장이었지만 투항한 주 전 충이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 사랑 황제를 폐위시키고 5대 10나라의 최초의 왕조인 후량 건국하는 당나라 멸망(618~907).⑤ 신라도 왕위 계승 전쟁(김 노리 마사의 난, 822년 3월~4월)등 혼란기여서 발해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.Ⅲ. 발해 고구려 계승 ①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인 연합 국가에서 지배층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(대씨 그), 피 지배층은 말갈인.② 발해 왕실과 귀족들이 매장된 육정산 고분군의 상층부의 무덤은 강한 고구려의 요소.③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“나 고려 왕 대 흠무는~”등 고려, 고려 국왕과 자칭.④ 발해 성곽은 성 축성 방법, 성내의 도시 계획 등 고구려 평양 성(외성, 나카죠, 우치지로)의 기본 구조와 유사.⑤ 갑옷·활촉·창착 등 무기류, 말 정자·마자 덩굴 등의 마구, 낫·삽 등 생산 도구, 기타 토기류 등 고구려와 유사.⑥ 사다에 공주의 무덤은 고구려의 굴식 석실 무덤과 유사. 온돌 장치, 이불 병 좌상, 발해 석등, 연꽃 무늬 기와 등도 고구려적 요소이다.⑦ 3성 6부 중앙 통치 조직, 상경 주작대로 정효 공주 무덤 양식(벽돌 무덤)에서 당나라의 요소.『 발해 건국 시조 대 조영 문헌 기록 』 『 구당서 발해 말 칡전 』 발해 말 칡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. 고구려가 멸망하자 조·용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에 들어온<신당서 발해전>발해의 시조는 본래 속칭 말 칡 출신으로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던 사람인 성을 데이씨다.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)동 어머니 산을 점령한<이 승휴의 제왕 운기>고구려의 구 장대 조영이 발해를 건국한<통일 신라와 발해의 관계>당의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신라가 일등을 차지하자 사신으로 가는 발해 왕자 대 봉예이 자신을 제일 위에 앉히자고(일명 쟁장 사건, 897년)당의 빈 공과에 840년대부터 발해 유학생이 빈 공과에 합격하면 신라가 ” 좋은 나쁜 나라인 발해인을 합격시키는 “과 당나라에 항의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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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 발해 고려의 중앙 정치 체제당의 3성 6부제 중서성(정책수립) → 문하성(정책의결) = 상서성(정책집행) 하위집행기관 → 2부 호부 예부 형부공부 발해의 3성 6부제 정당성(정책수립·의결) = 선조성/중대성(정책의 이원적 집행) 하위집행기관 → 충부인부 의정부지부(유교의 덕목을 집행기관 명칭으로 사용)




